새 우표발행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법령발포 10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우표발행국에서는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법령발포 10돐을 맞으며 우표를 발행하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우표발행국에서는 전반적12년제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대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법령발포 10돐을 맞으며 우표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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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봉건왕조시기의 우표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에서의 우표발행은 19세기 70년대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형성된 개화파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하여 시작되였습니다.
김옥균(1851-1894)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들은 외래침략을 막고 국권을 수호하며 봉건제도를 혁신하고 나라를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는것을 목적으로 하여 개혁활동을 벌리였으며 그 일환으로 새로운 우편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우편제도를 근대화하기 위한 사업은 주로 홍영식(우정총국 총판 1855-1884)이 맡아 수행하였습니다.
개화파의 노력에 의하여 1882년에 우편기구인 우정사가 설치되였고 1884년에 새로운 우편제도를 내오면서 그것을 총괄하기 위하여 우정총국이 설립되였으며 1884년 10월 1일(양력 11월 18일)에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의 문위우표(당시 화페단위가 《문》이라는데로부터 붙여진 이름)가 발행되여 근대적인 우편활동이 개시되였습니다.
문위우표는 우정총국의 업무개시와 동시에 판매할 예정으로 우표 5종(5문,10문,25문,50문,100문)을 인쇄의뢰하였으나 개업날인 10월 1일까지 2종(5문,10문)만이 도착하여 그해 10월 19일까지 서울과 인천에서 사용되였습니다.
나머지 3종(25문,50문,100문)은 1884년 10월 17일 우정총국 청사 준공식을 계기로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우정총국이 페쇄된 다음해인 1885년초에야 납입되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문위우표 5종중 2종(5문,10문)은 19일간 사용되였으며 3종(25문,50문,100문)은 미발행으로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때로부터 명성황후세력이 재집권한 10년동안 우표는 발행되지 못하고 갑오개혁이 실시된 다음해인 1895년 6월 1일(양력 7월 22일) 우정사업의 재개와 함께 태극보통우표 4종이 발행되였습니다.
1897년 10월 12일 《조선국》이라는 국호가 달라진것과 관련하여 그해 10월 14일에 태극보통우표에 《대한》이라는 글을 덧인쇄한 우표 4종이 발행되였고 1899년에는 신문우편에 사용할 1푼짜리 우표 2종이 태극보통우표에 액면을 덧인쇄하여 발행되였으며 1901년부터 1903년사이에는 푼단위우표에 전단위를 액면덧인쇄한 우표 4종이 발행되였습니다.
그리고 1900년 1월부터 1901년 5월사이에 우리 나라의 화가 지창한이 도안한 리화보통우표 14종이 발행되였습니다.
또한 1902년 10월 18일에는 조선봉건왕조 26대왕인 고종황제즉위 40돐 기념우표 1종을,1903년 6월 1일에는 국제우편교류의 확대와 우표수집의 목적에서 각이한 액면을 가진 독수리보통우표 13종이 발행되여 전국적으로 판매보급되였습니다.
그러나 1905년 4월 우리 나라의 체신권은 일제에게 전면적으로 강탈당하였으며 당시 보급되였던 우표들은 1909년 8월 31일까지만 허용되여 일본우표와 함께 사용되였습니다.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조선봉건왕조시기 우리 나라에서는 1884년부터 1905년까지 20여년동안 10종의 덧인쇄우표를 포함하여 44종의 우표(3종의 미발행우표는 포함하지 않음)가 발행되여 사용되였으며 그후 일제의 조선강점으로 말미암아 우편봉사활동은 자기의 존재를 마치게 되였습니다.